Chapter 4 : 윤회(輪回)하는 유혈미궁(流血迷宮)



    자레스 왕조에서 사마리아 지하의 뷰엘을 손에 넣은 로이들, 그들은 지금 미노아 항구에서 미레제 섬의 수크리아 항구로 향하는 배 위에 있다. 지난번 일행을 안개탑까지 태워다 줬던 윌은 로이들이 미레제 섬으로 가야 한다고 하자 기꺼이 배를 태워 준다. 로이도 마리우스, 아리엘조차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 그곳에 세 조각 난 뷰엘 중 두 조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항구는 비교적 번화한 도시를 연상케 할 정도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분명 저들 중에서 네브리노의 미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어느 한 사람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알아낸 것은 고작 미레제 섬 북쪽에 있는 루안 마을로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루안 마을로 가는 유일한 길인 골 계곡이 사악한 힘에 의해 막혀 버려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이 때 수크리아의 대상인 로콘이 루안 마을로 보낼 화물을 호위할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정보가 로이들의 귀에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찾아 갔더니 마침 그는 호위할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무척이나 고심하고 있다. 로이들이 자신들에게 화물 호위을 맏겨 달라 자청하자 로콘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들과 계약을 체결한다. 그의 집에는 가보인 푸른 빛의 검이 전해 오는데 이 검은 가벼운 만큼 속도가 빨라 연속 공격을 가능하게 해 준다. 로이가 검을 팔라고 제의하지만 로콘은 어떻게 가보까지 팔아 가며 돈을 모으겠냐며 한마디로 딱잘라 거절한다. 그러나 여러 번 계속해서 매달리면 로이들에게 검을 팔겠다고 은근히 승낙하는데... 그 가격은 이 게임 상에 등장하는 어떤 장비보다도 비싸다.

    뭐! 어떻게 가보까지 팔아가며 돈을 모으겠냐고? 역시 상인들의 상술이란...

    검을 구입한 후 네브리노의 미궁에 관해 물어 보자 그는 항구의 잡화점 주인인 미라가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정보를 서비스로 제공한다. 평소에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자주 한다는데...

    그렇다면 미친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로이들의 발길은 이미 잡화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라는 로이들에게 네브리노의 피눈물을 멎게 해 달라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루안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 길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루안 마을로 가는 것 뿐. 로콘으로부터 루안 마을의 촌장 빌 앞으로 수송할 화물을 인수받은 후 그들은 골 계곡으로 떠난다.

    계곡의 몬스터들이 종종 앞을 가로막지만 푸른 빛의 검이 있는 이상은 일행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길은 점점 숲 속을 향해 내달리고, 얼마가지 않아 그 끝을 여행자들에게 보여준다. 거대한 고목 한 그루가 길 한 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어 로이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 와중에 거목에 박혀 있는 검 한 자루가 일행의 시선을 끈다. 마리우스가 그 검을 뽑으려 하자 화물 수송원 중 한 명이 기겁을 하며 그를 말린다. 본래 거목은 살아 움직이는 괴물로 길을 지나가던 여행자들을 주로 공격해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안 마을의 길이란 사람이 더 이상의 화를 막기 위해 자신의 검을 거목 깊숙히 박아 놓았고, 그 결과 거목은 그 검의 마력에 의해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목을 불로 태워버리면 되잖아!

    작가의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아리엘의 백색수정의 지팡이가 네오 휠·엘시스 주문을 발하는데... 거목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지만, 이게 웬일인가? 거목이 다시 움직이다니! 거목 구르는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로이들을 향해 공격해 온다. 구르는 마법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검으로도 치명타를 입히기 어렵다. 마치 뭔가 알 수 없는 마력의 도움을 받고 있는 듯이... 그렇다! 지금껏 박혀 있던 검이 구르에게 마력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엘이 재빨리 구르의 몸에 달라붙어 검을 뽑아 내자 구르의 힘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 때를 놓칠소냐! 로이와 마리우스의 검 앞에 결국 거목 구르는 힘없이 쓰러진다. 아리엘의 손에는 방금 거목에서 뽑아낸 엄청난 마력이 담겨 있는 마도사의 검이 쥐어져 있다. 왜 길이란 자가 이런 짓을 했을까?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간직한 채 여행자들은 거목이 서 있던 자리 뒤로 길게 뻗은 오솔길을 따라 루안 마을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적한 산골 마을 루안, 이 곳 사람들은 로이들이 무사히 골 계곡을 통과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무척 반가워 한다. 촌장 빌은 화물을 수송해 온 그들에게 사례금과 함께 잔치를 배풀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해 준다. 여독이 풀리자마자 로이들은 미라의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길이란 자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눈에 비친 길은 놀랍게도 흑마도사였다. 마법 가게의 주인인 그는 여러 가지 흑마법이 담겨 있는 마법의 지팡이들을 팔고 있는데 백마법만을 사용할 수 있는 로이들이 흑마법의 힘을 빌려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길은 세 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시종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일관한다. 로이가 거목 구르에 박혀 있던 검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며 아리엘에게 마도사의 검을 그냥 줘 버린다. 그리고는 더 이상 귀찮게 굴면 세 명 모두 돌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로이들을 강제로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 그런 그에게 로이는 미라의 편지를 보여준다. 길은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흘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뭐 이런 기분 나쁜 자가 다 있지?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로이들은 그만 가게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버린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네브리노의 미궁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던 로이들의 정성은 이제 미력하나마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촌장 빌은 시련의 바위산에 사는 요정들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들을 만나보라 조언해 준다. 시련의 바위산이라... 이름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 번쯤 가 보는 것도 손해될 건 없지. 또 베 짜는 여인 사란은 네브리노의 미궁이 지상의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마다 나타난다는 전설을 들려준다.

    사마리아는 본래 지하로부터 솟아오르는 사악한 흑마력의 진원지로 모든 지상의 재앙은 바로 이 곳에서 기인한다. 이를 막기 위해 빛의 신들은 백마력을 결집시켜 놓은 뷰엘을 통해 사마리아의 힘의 균형을 원점으로 돌려 놓았다는 것. 그러나 지금 뷰엘은 그 힘을 잃어버린 나머지 세 조각으로 나누어져 정해진 장소에 봉인되어 버렸고, 그래서 네브리노의 미궁이 500년 만에 지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이 사란이 알고 있는 전설의 요지. 앞 뒤 연결이 잘 안되는 흠이 있긴 하지만 자신도 들은대로 말했다니... 로이들의 다음 행선지는 시련의 바위산, 떠나는 그들의 마음 속은 모두 한 가지 바램으로 채워져 있었다. 요정들이 부디 네브리노의 미궁의 위치를 알고 있기를...

    시련의 바위산은 비록 규모가 크진 않지만 숨겨진 길이 제법 있어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요정이 사는 곳을 모르는 로이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 자그마한 샛길을 통해 계속 나아가자 한적한 호수가 하나 나온다. 이름하여 요정의 호수, 그러나 이름만 그럴 뿐 요정은 고사하고 요정의 그림자조차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바위 위를 자세히 살펴 보면, 앗! 웬 속옷이... 호수 안에서 요정이 목욕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요정의 속옷을 갑옷 안에다 받쳐 입으면 방어력이 상승한다. 요정들이 있는 곳은 한 아담한 동굴 속, 그들은 이 산의 주인이 되려는 다크 쉐도우 데스퍼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이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네브리노의 미궁의 위치를 아느냐는 로이들의 질문에 아무도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절망에 빠지는데... 이 때 요정의 왕자가 네브리노의 미궁의 위치를 가리키는 피의 나침반은 누군가가 이미 가져 갔지만 미궁의 입구를 만들어주는 윤회(輪回)의 고리는 요정의 보금자리에 있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왕자는 그곳이 이미 다크 쉐도우 데스퍼의 세력 하에 들어가 있어 갈 수 없다며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로이들이 다크 쉐도우 데스퍼를 처치해 줄테니 윤회의 고리를 넘겨달라는 부탁을 하자 왕자는 그들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

    요정의 보금자리는 산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다크 쉐도우 데스퍼는 로이들이 나타나자 윤회의 고리를 지키는 것이 네브리노님이 자신에게 내린 사명이라며 맹렬히 공격해 온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주문들에 고전하겠지만 데스퍼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쉐도우들을 제거해가며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면 결국 쓰러지는 쪽은 다크 쉐도우... 그가 로이들에 의해 쓰러지자 요정의 보금자리에는 다시 빛이 찾아온다. 요정의 왕자는 감사의 증표로 윤회의 고리를 그들에게 넘겨 준다. 500년 전 요정들의 조상은 신들로부터 윤회의 고리와 피의 나침반을 하사받아 대대로 지켜왔다. 그러나 피의 나침반이 언제인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요정들은 남은 윤회의 고리를 지키기 위해 고심했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네브리노의 미궁으로의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에... 결과적으로 다크 쉐도우 데스퍼와 요정들의 의도는 동일했다. 외부인이 미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 차이점이 있다면 데스퍼는 윤회의 고리를 빼앗음으로써, 요정들은 윤회의 고리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의도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로이들이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을 손에 넣으려면 피의 나침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도대체 어디에서? 그들은 피의 나침반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루안 마을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 때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데스퍼가 기습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의 공격을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사태는 무사히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로이가 탈혼(脫魂)상태에 빠졌음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마리우스와 아리엘은 소환의 피리를 불어 로이의 혼을 다시 불러 들이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소환의 피리를 불어도 로이의 상태는 회복되지 않고, 당황한 그들에게 요정의 왕자는 금단의 비법에 의해 탈혼되었으므로 금단의 비법으로 혼을 소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마을에 금단의 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막연한 희망을 안은 체 아리엘은 로이를 업고 있는 마리우스와 함께 루안 마을로 순간이동해 간다.

    촌장 빌은 사마리아에서 금단의 비법을 알고 있는 인간은 단 두 사람 뿐이라고 알려 준다. 사마리아 최고의 백마도사인 실과 흑마도사 길이 바로 그들. 그러나 아리엘의 아버지인 실은 이미 사교의 전사들에 의해 살해당했기에 마리우스와 아리엘은 주저할 겨를조차 없이 흑마도사 길의 집으로 달려간다. 길은 셋의 급작스런 행보에 다소 놀라는 듯 하더니 로이의 상태를 간파하자 곧 냉정을 되찾는다. 마리우스는 길에게 금단의 비법으로 로이의 탈혼 상태를 회복시켜 달라며 간청하지만 길의 반응은 예상 외로 냉담했다. 뭐, 금단의 비법은 이미 다 잊어버렸다나... 거듭되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거절당하자 아리엘은 울화가 치밀어 길에게 따져든다. 격렬한 둘 간의 말싸움이 계속되고, 길은 더 이상 세파(世波)에 말려들기 싫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들에게 실망을 했다.

    그러자 아리엘은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지금 사마리아가 처한 위기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백마도사인 아버지 실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로이를 회복시켜 줄 사람은 당신 밖에 없다... 그 말에 길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이 아이가 실의 외동딸이었단 말인가.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길은 로이만을 남겨 두고 모두 나가라는 말 한마디로 정적을 깨뜨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길의 집을 나서는 마리우스와 아리엘은 그의 뒷 모습에서 그가 겪었던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를 느끼는데...

    베 짜는 여인 사란은 마리우스와 아리엘에게 흑마도사 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그는 본래 백마도사 실의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제자를 양성하는 동안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실이 자신의 외동딸을 선택하자 독신이던 그는 부모 없는 한 여자 아이를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10년 후에 제자들의 실력을 비교해 보자는 약속과 함께. 그의 제자는 흑마법에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마도 그는 생의 한 조각 보람을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6년 후 그녀는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은 흑마원주문 람피스토를 배우기 위해 길의 방을 뒤지던 중 우연히 사교의 경전을 발견했다.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게 어두워지자 그는 람피스토 주문은 백마원주문 프라켄처럼 생명에너지를 소모시키므로 어른이 된 후에 배워도 늦지 않다며 그녀를 만류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전혀 뜻 밖이었다.

    오세리스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

    순간 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때 사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경전을 압수한 후 그는 그녀에게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사교의 매력에 깊숙히 빠져 들어갔다. 그녀의 요청으로 수크리아 항구에서 루안 마을로 오는 상인들이 사교의 금서를 제공해 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거기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길도 거기까지는 미처 신경이 미치지 못했다. 단지 시간이 흐르면 본래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 듯이 그녀의 비밀스런 행동은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다. 자신의 모든 희망과 보람, 행복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자 길은 제자를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녀는 야밤을 틈타 마을에서 도망쳐 버렸다. 그때부터 길은 3년 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그 동안의 과정에서 드러난 실수에의 자책감,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 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서 오는 괴로움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 약속한 지 꼭 9년이 되던 어느날, 아무런 말 없이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제자에게 주려고 만들어 놓은 검을 거머쥔 채 골 계곡으로 향했다. 자신의 마법을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사란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리우스와 아리엘의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거목 구르에 박혀 있던 마도사의 검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다. 아리엘은 뭔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마리우스는 그런 그녀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 나선다.

    아리엘의 발걸음은 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로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길이 금단의 비법으로 로이의 탈혼 상태를 회복시킨 것이다. 아무말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길에게 아리엘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바로 당신이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그란 아저씨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아리엘은 어렸을 적부터 실에게서 종종 그란, 지금의 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이니 만나게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그녀가 그 당시에 들은 그란의 모습은 차갑지만 정의와 의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는 남자, 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길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에 아리엘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부정(父情)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길은 그녀에게 그녀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회에 젖어 들고, 로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리우스를 바라보기만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로이들의 사명을 전해 들은 길은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 주겠다며 커다란 선물을 하나 선사해 준다.

    이것은... 피의 나침반!

    길은 네브리노의 미궁이 사악한 자에 의해 봉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까지 은밀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다며 하루 빨리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을 찾아 오길 기원하겠다고 말한다. 네브리노의 미궁은 미궁 내를 끊임없이 윤회하는 피 때문에 유혈미궁(流血迷宮)이라고도 불린다. 피의 나침반은 그러한 미궁 내의 피의 흐름을 감지해 내는 도구. 길의 설명이 끝나자 로이들은 길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마을을 나선다. 한 손에는 윤회의 고리를, 다른 한 손에 피의 나침반을 거머쥔 로이의 눈은 넘쳐오르는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로이들이 피의 나침반의 지시에 따라 도착한 곳은 미레제 섬의 서부에 위치한 어느 숲속, 입구를 발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보름달 아래서 윤회의 고리를 들어보이자 피의 나침반이 마지막으로 가리켰던 곳에 미궁의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피 비린내, 미궁 안은 횃불이 밝혀져 있어 그리 어둡진 않지만 막다른 골목과 함정들이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미궁은 본궁을 감싸고 있는 외곽 미로와 중앙의 지하 본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곽 미로의 한 상자 안에는 수호기사의 투구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방어력 상승의 효과가 있으므로 손에 넣어 두는 것이 유리하다. 또 미로의 외딴 곳에 있는 제단에서는 영원의 촛대를 얻을 수 있다. 한참을 헤맨 로이들이 다다른 곳은 외곽 미로의 출구, 그 곳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청객이 하나 있다. 바로 암흑괴수 조바, 그는 주위를 칠흙 같은 어둠 속으로 빠뜨린 후 일행을 향해 공격해 온다. 화염 주문인 휠·엘시스나 전격 주문 필·엘시스로 주위를 밝혀가며 공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다.

    이제 중앙의 지하 본궁으로... 그런데 본궁 안은 횃불로도 어쩔 수 없는 암흑 세상 그 자체이다. 영원의 촛대는 바로 이럴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비록 볼 수 있는 시야가 좁혀지긴 하지만 아예 안보이는 것보단 나으니... 본궁의 한 보물 상자 속에는 마법의 위력을 향상시켜 주는 마력의 반지가 들어 있다. 본궁의 중앙에는 원형으로 석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넓은 방이 하나 있는데, 이상한 것은 석상들이 한결같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 본궁의 지하 가장자리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창고가 있다. 맞은 편에는 벽에 아로새겨진 비문과 보물 상자 하나가 놓여져 있는데... 아무런 의심 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선 로이들은 입구가 저절로 닫혀 버리자 깜짝 놀란다. 뒤이어 나타난 방해자는 혈마 이마갈, 피를 뿌려 일행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며 데스필 주문으로 사기를 떨어뜨려 전의를 상실시키는 전략도 사용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로이의 경우는 그의 정신력의 원천인 엘리네의 펜던트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마갈을 쓰러뜨리고 보물 상자를 열면 네브리노의 하프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어디에 쓰는 것일까? 고대인의 가면으로 벽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해독하면 네브리노를 위해 대신 슬퍼하고 있는 자들을 쉬게 하라고 하는데, 혹시? 석상들이 흘리던 피눈물이 떠오른 로이들은 다시금 본궁 중앙의 방으로 돌아온다. 아리엘이 능숙한 솜씨로 하프를 타자 석상들의 피눈물이 멈추고, 숨겨져 있던 금단의 통로가 그들 앞에 입구를 드러낸다. 입구에서 시계 방향으로 4번째에 서 있는 석상의 손에 소멸의 구슬이 쥐어 져 있으므로 꼭 가져가도록 하자.

    통로는 일직선으로만 뻗어 있다. 그런데 그 끝이 가시덤불로 가려져 있어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는데... 어떤 마법으로도 태워지지 않자 로이들은 무척 난감해 한다. 마리우스는 홧김에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그냥 가시덤불 속으로 휙 던져 버린다. 순간 엄청난 화염의 열기가 느껴지더니 로이들의 앞을 막고 있던 가시덤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게 아닌가! 마리우스가 던진 것은 바로 소멸의 구슬,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셋은 열기가 모두 사라지자 다시 통로의 끝을 향해 맹렬히 뛰어간다. 화려한 문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고, 로이는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먼저 방안으로 몸을 내던진다.

    마리우스와 아리엘은 먼저 들어간 로이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바람에 부딪혀서 넘어진다. 갑자기 그렇게 멈추면 어떡하냐! 로이의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로이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 남자는 아름답게 장식된 상자를 들고 있다. 저 안에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이 들어있구나... 그러나 셋 가운데 누구하나 앞으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남자로부터 전해져 오는 엄청난 마기가 묘한 공포심을 유발하여 일행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상황을 이겨내지 않으면... 로이는 싸워 보지도 않고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먼저 남자를 향해 다가간다. 다리가 점점 떨려오는 것이 느껴지긴 하지만. 남자는 로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갑자기 땅으로부터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 상자를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네브리노에게서 빼앗아 봐라.

    저자가 바로 네브리노! 유혈전사 네브리노, 유혈미궁의 주인이자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을 지키는 수호기사. 로이들은 이번 싸움이 예전과는 다른 필사의 사투가 될 것이라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전투태세를 취한다. 네브리노는 판 계열의 백마법과 흑마법, 그리고 막강한 검술을 모두 구사하므로 방심은 금물. 무엇보다도 정신력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끈질긴 공방전 끝에 네브리노도 결국 로이들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네브리노는 자신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라며 눈물을 흘린다. 사마리아의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비물 뷰엘, 그것이 조각나 버리면 힘의 균형이 흑마력 쪽으로 넘어가 사마리아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유혈미궁은 다시 지상으로 윤회해야 하고, 네브리노는 또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뷰엘의 한 조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그의 고통을 위로해 주기 위해 석상들이 대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는 상자를 로이에게 건네주며 영원히 지하에서 쉴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미궁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고, 로이들은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들판에서 네브리노의 유언을 가슴 속에 깊이 되새기며 각오를 다진다.

    네브리노의 유혈미궁이 지상으로 윤회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오직 하나. 뷰엘이 또다시 그 힘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영원히 사마리아에 평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것이다. 로이, 마리우스, 아리엘은 자신들이 그 목표를 이루겠노라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굳게 다짐하는데...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은 이렇게 로이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 무렵, 닐쿠퍼 시의 사교의 수도원에서는 또 다시 오세리스의 계시가 내려오고 있었다. 오세리스는 위오의 대리자가 이미 사마리아 지상의 뷰엘을 손에 넣고 사마리아의 성전으로 향하고 있다며 카이엘에게 그들을 제거하라는 명을 재차 내린다. 계시가 끝나자 요사는 자레스 왕조의 지하무덤에서 로이들을 처치하지 못한 크로스를 문책하는데... 이 때 흑마기사 바실레스가 이젠 자기 차례라며 카이엘에게 자신을 사마리아의 성전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요사는 미처 카이엘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바실레스의 요청를 허락하고, 그런 요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카이엘은 명을 기다리는 바실레스를 사마리아의 성전으로 출격시킨다. 단지 신관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대리자인 자신의 위에 군림하려는 교활한 늙은이! 평소에 경쟁관계에 있던 바실레스와 크로스, 그들의 지나친 승부욕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요사는 카이엘에게 있어선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하고 말리라.

    한편, 로이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크로스는 바실레스가 공을 세우게 될까봐 내심 불안해 한다. 불현듯 그녀의 뇌리를 스쳐 가는 직감, 혹시 스승님이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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