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단의 추억



    오후 11시 36분...

    바로 학원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도착한 시간. 회사 일과가 끝나면 일주일에 3번씩 지하철을 타고 대학로에 있는 한 음악학원에 다녔다. 한밤인데도 열대야때문인지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그래도 삼호물산 빌딩에서 양재역까지는 항상 걸어다녔다. 순환버스가 있긴 했지만 낯선 서울 생활 중에 거리를 걷는 것만큼 재미있고 가슴설레는 일도 없었으니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온 길을 되짚어 삼호물산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엘리베이터 3대 중 왼편 안쪽에 있는 승강기의 버튼을 눌렀다. 바깥쪽 엘리베이터는 내가 가야할 4층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회사 출입구의 지문인식기에 사원번호와 지문을 찍자 문이 열렸다. 경만옹은 여전히 이항씨랑 워크래프트3 한다고 정신이 없고, 진욱이는 피곤한지 먼저 숙소로 들어가고 없었다. 회사에 남은 인원은 게임 중인 경만옹과 이항씨, IGS 파트의 밤샘근무자인 민기씨랑 영태씨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 전부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 모니터를 켰다. 내 캐릭터는 여전히 클라이언트 디버깅 모드에서 열심히 약초를 캐고 있었다. 다시 'Z'키를 눌러서 자동생산 모드를 해제한 후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프로젝트를 닫았다. 이제부터 정식으로 플레이를 시작하려는 거다. 바탕화면에 있는 스퍼마 문양의 아타나시아 단축 아이콘을 더블클릭, 닐롯서버에 접속했다.

    니히룸 법사인 레벨 19의 여성캐릭터 '에우론'은 캘러스 주변 돌산에 있는 칠엽초 밭으로 떨어졌다. 경험치는 주황 색 끝, 조금만 더 올리면 새로운 마법인 '제아파오스'를 익힐 수 있었다. 마법 수련에 필요한 퀘스트 아이템은 이미 '천지신화'님이 구해 놓으셨다. 칠엽초 밭에 떨어지자마자 몇 일 전부터 약초캐면서 알게 된 '간호사'님과 인사를 나눈 후 '천지신화'님의 귓말을 받고 곧장 플루낙스 평원으로 달려갔다. 약초캐서 모은 돈으로 실크 마화 세트에다 마커스 스태프까지 장만한 '에우론'... 우레시모를 향해 뻗은 대륙 종단 시작점에서 '천지신화'님과 또 다른 전사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새 파티의 구심점이 되어버린 '마법의진'님과, '천지신화'님과 친분이 있었던 '스퍼마드보라'님도 함께... '마법의진'님은 아이온(불) 법사, '스퍼마드보라'님은 스퍼마(물) 법사, '천지신화'님은 알키르(빛) 법사, '에우론'은 니히룸(공허) 법사... 6명 풀파티 중 무려 4명이 법사였던 파티였지만 각각의 한 방 덕분에 전사들의 부담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도적 19번부터 17번까지, 물론 마법이 잘 안박히면 도망치기도 했지만... 우선 전사 한 명이 도적을 유인해오면 나머지 한 명이 뒤로 돌아가 선제공격을 가했고 도적이 등을 돌리는 순간 3명의 법사들이 각각 아스테브레(아이온), 스파이라(알키르), 페리볼 프로비(니히룸)로 공격하는 사이, 전사들은 스퍼마 법사의 니크오와 슈코로 생명력과 스태미너를 보충받았다.

    그러기를 한 시간 여...
법사들의 마나가 떨어지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을 무렵 느닷없이 다른 파티가 도적 12번을 몰고 오는 바람에 '에우론'은 그만 경험치 빨강 끝에서 누웠고 나머지 파티원들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체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열받는 테러란 말인가... 그룹말로 일단 파티를 수습해서 한 자리에 모으는데는 성공했지만 서로 친구로 보이는 전사 두 분이 사정이 있어 나가 봐야 한다는 의사를 건넸다. 결국 오늘 사냥은 접어야 하나 보다. 전사 두 분이 파티에서 탈퇴하고 나가버리자 나머지 4명의 법사들은 다시 우레시모 대륙 종단 시작점에 모여 전사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오늘 사냥의 목적이 다름아닌 '에우론'의 레벨 20만들기가 목표였는데 레벨업 직전에 누워버렸으니 본의 아니게 비상이 걸려버린 셈이었다. 그때 돌산 칠엽초 밭에서 열심히 약초를 캐고 있던 '간호사'님에게 귓말이 왔다.

    "아직 사냥하고 계세여 ^^?"

    "넹 ㅡㅜ"

    "... 표정이?"

    "업 직전에 누웠어영..."

    "에구... 이걸 어째 ㅠㅠ"

    "그래서 지금 전사 모집하러 다시 플루낙스 시작점에 모여 있어영..."

    "전사가 없어영?"

    "넹, 여기 법사분만 4명 ㅡㅜ"

    "음... 잠시만영."

    "넹..."

    "저 백조로 들어갈게영. 잠시만 기다려영."

    "호곡, 렙차때문에 파티 안되잖아영... ㅡㅜ"

    "ㅋㅋㅋ 그냥 파티 안하고 몸빵만 하졍 뭐 ^^;;;"

    "에구... ㅡㅜ"

    "님 렙업 하실 때까지만영 ^^;;;"

    그리고 잠시 후 플루낙스 남단에서 열심히 뛰어오는 '집지키는백조'님을 만날 수 있었다. 고렙 전사의 등장으로 활기를 되찾은 파티는 새벽 2시 반까지 사냥을 계속했고, 그 결과 '에우론'은 마의 19레벨을 지나 당당히 20레벨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새로운 공격마법 '제아파오스'를 익힌 '에우론'은 파티원들에게 새 마법을 시연해 보여줬고, 한동안 수다를 떨다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서로 내일을 기약하며 서버를 떠났다.

    컴퓨터를 끄고 IGS 파트로 놀러가보니 마침 야식이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민기씨 영태씨랑 '아타나시아'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눈 뒤 때마침 자리를 뜨게 된 경만옹, 이항씨랑 함께 회사를 나섰다. 숙사로 돌아가는 길... 또 하루 재미있었던 기억들이 방울방울 달콤한 단잠 속으로 스며들 준비를 하는 시간. 내일 아침에는 지각 안하려고 어떤 쇼를 하게 될까? 한 조각 기우에 잠시나마 신경을 할애한 다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 무렵 '마법의진'님, '천지신화'님, 그리고 '에우론'은 닐롯서버 내에서 '어여뿐자매단'이란 이름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4번째로 들어온 '집지키는백조'님과 막내였던 '천사마녀'님까지... 매너좋고 재미있는 여성캐릭터들이 모여 그 이후로도 계속 '자매단'이란 이름으로 필드를 누비고 다니곤 했다. 그 후 레벨 39까지 지켜 봤던 '집지키는백조'님은 남자친구랑 '릴(RYL)'한다고 '아타나시아'를 떠난 관계로 최종 레벨이었던 40의 모습을 보진 못했다. 내가 있던 양재랑 지척에 있었던 매봉에 직장을 둔 큰 언니 '마법의진'님도 제일 먼저 렙 30을 넘었지만 그 후 직장 일때문에 들어오시지 않으셨고, 일주일에 주말만 접속하시던 '천사마녀'님은 레벨이 가장 낮아 파티하기도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앨로드'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던 유일한 자매단 일원. '천지신화'님은 캐릭터를 '샤프리니아'로 바꾸신 후 레벨 39의 벽을 넘지는 못하셨지만 끝까지 나와 함께 하셨던 분 중 하나. 그리고 '에우론'은 레벨 40이 되어 '아타나시아' 서비스 종료 시점까지 용두상을 지키며 유저들의 택시(?)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해냈다.

    이 모든 꿈만 같이 재미있었던 추억들은
2003년 1월 29일, '아타나시아' 서비스 종료로 인해
영원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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