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UFL 훈련 때 있었던 일이다.
훈련에 직접 참여하는 각 처부의 간부들이 교대로 LSOC 에서 밤을 샜던 그 때,
난 이틀에 한 번 꼴로 사령부 일직상황 근무를 서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우리 내무실 상황병 4명 중 2명이 훈련에 참가하는 관계로 4일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근무 간격이 반으로 줄어든 탓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그 날의 일직사령은 다름아닌 교육대장이었다.
본래 지휘관급은 일직근무를 서지 않지만 훈련기간만큼은 예외적으로 일직근무에 투입되곤 했다.
처음으로 근무를 서 보는 간부라 잘 몰랐는데 일직부관이랑 상황병들을 자기 개인 비서처럼 부리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데 도가 트인 사람이란 느낌이 팍 들었다.
아, 오늘 재수에 옴 붙었구나...
한탄할 겨를도 없이 새벽 4시가 다 되서 또 일직사령 명령이 떨어진다.
"야, 너 본부대 올라가서 커피 뽑아와."
달랑 커피 두 잔 뽑으려고 본부대 막사까지 올라가서 자판기 앞에 서 있으니까 근무서고 있던 불침번들이 다 놀라더라.
근무 내용가지고 귀찮게 하는 건 다 참아도 뭔가를 시키는 일직사령의 태도가 딱 밥맛이다.
그렇게 근무가 끝나고 이틀 뒤, 난 또 재수없게도 그 교육대장이랑 다시 근무를 서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16시 30분까지 지휘통제실에서 대기해야 할 일직부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훈련 때라 간부들 간에 근무를 워낙 많이 바꾸다 보니 당일 근무자를 추적하는 것도 일이었다.
오늘의 재수없는 부관은 다름아닌 내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물자처 하대위님이셨다.
"야, 지금 몇 신데 부관이 안 와? 오늘 근무 누구야!?"
옆에서 또 일직사령이 들볶기 시작한다, 젠장!
"물자처 하대위입니다."
"이런 XX년, 정신이 나갔구만!"
아무리 상대가 여군이라도 그렇지 상스러운 욕을 그냥 막 늘어놓는다.
선배님이 너무 걱정이 되서 바로 충성아파트로 몰래 전화를 했고, 한참 벨이 울린 후에야 하대위님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오늘 근무신데 빨리 나오셔야 겠습니다."
"나 오늘... 근무 아닌데...?"
여기서 한 10분 정도 근무자 추적 결과를 브리핑하자 전화 목소리가 달라졌다.
"오늘 일직사령 누구야?"
"교육대장님이십니다."
"지금 당장 나갈게."
30분 뒤 근무를 나오시긴 했는데 그때는 이미 7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다.
본래 성격이 화통하셔서 윗사람에게도 하고 싶은 말 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날 만큼은 잘못한 구석이 있으니 아무리 속에서 열불이 나도 그냥 참을 수 밖에...
밤 9시가 넘자 일직사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 옆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그리고는 유리 너머로 안이 다 보이는 정작처 작전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직사령이 옆 사무실로 들어가자 지통실에 남겨진 나머지 3명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다.
"아, 한 소리 하고 싶어도 근무 늦게 온 거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나랑 나보다 두 달 고참이었던 1내무실 우철이도 짜증스럽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때 다시 울려퍼지는 일직사령 고함소리...
"야, 이리로 한 명 들어와!"
짬 모자라는 내가 들어갔다, 젠장! 그리고 일직사령의 지시를 받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사령이 뭐라고 하든?"
우철이의 질문에 난 전투모를 챙기며 대답했다.
"소화가 잘 안된다고 의무실에서 약 좀 타오랍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런데 그 말과 함께 우철이 무릎을 탁 치더니 느닷없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나 우철인데, 일직사령님께서 소화제 좀 달라고 하시거든?"
분명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야, 거기다가 수면제 몇 알만 좀 넣어 주라."
웃긴 건 그 말에 놀란 사람이 나 뿐이었다는 사실.
아니 어떻게 일직사령한테 수면제를 먹여? 그러다 걸리면 어떡하라고... 하지만 옆에 계신 부관님 하시는 말씀,
"가능하기는 할까? 안자면 어떡하지?"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의무실에서 약을 타 오는데는 성공했다.
일직사령에게 약을 건네 주자 주저 없이 한 봉을 털어 넣은 후 작전과 사무실로 돌아갔고
나머지 우리 3명은 유리창 너머로 일직사령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수면제를 먹고 2시간이 지나도 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말 강적 중의 강적이 아닌가 싶었다. 보다 못해 초조해진 우리 부관님,
"야, 진짜 수면제 넣은 거 맞아? 의무실에 한 번 전화해 봐."
그때 일직사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지통실로 넘어오는 게 아닌가...
"무슨 소화제를 먹어도 속이 안 가라앉아?"
이 말을 들은 우철, 특유의 재치를 십분 발휘한다.
"한 봉 더 드시면 괜찮으실겁니다."
"응?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도 아니고 약을 누가 그렇게 달아서 먹나?"
"소화제는 본래 괜찮지 말입니다."
"그래? 어디 한 봉 다시 줘 봐."
자기 무덤을 판다, 파...
우철이가 건넨 약 봉지를 다시 비운 우리 일직사령,
그 이후 다음날 아침에 사령관님 출근하실 때까지 곤히 꿈나라에 빠졌고,
덕분에 우리 3명은 모처럼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근무 교대하면서 일직사령이 우철이에게 하는 말,
"야, 네 말대로 약을 두 번 먹으니까 속이 편안해 지는게, 덕분에 잠도 잘잤네."
나도 속으로 말했다.
'네, 덕분에 우리도 모처럼 평화로운 밤을 만끽할 수 있었네요.'